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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 에스테이트 티

커피스터디

싱글 에스테이트 티
차 또한 커피와 마찬가지로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앞서 이야기했다. 싱글 오리진 티Single Origin Tea, 블렌디드 티Blended Tea 그리고 플레이버드 티Flavoured Tea. 이번 시간에 소개할 싱글 에스테이트 티Single Estate Tea는 싱글 오리진 티에서 좀 더 나아간 형태의 차인 한편, 어떤 의미에서는 지난 시간에 소개했던 블렌디드 티와 대척점에 있는 차라 할 수 있다. 이번 수업에서는 싱글 에스테이트 티에 관해 살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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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하나뿐인 차
 

어쩐지 이름이 길면 그럴싸해 보인다. 비싼 와인일수록 병에 붙어있는 라벨에 나라와 산지 그리고 어느 마을의 밭인지 상세히 적혀있다. 포도의 품종과 와인의 종류는 물론 농원의 이름에, 때로는 만든 사람의 이름까지 붙곤 한다. 커피도 다르지 않다. 어느 나라의 어느 지역인지 그리고 누가 어떻게 가공해 만들었는지 세부적인 정보가 자세히 나와 있을수록 가격표에 적힌 숫자가 불어난다. 와인과 커피의 연장선상인 서구의 차 산업 또한 마찬가지다. 런던 피카딜리의 ‘포트넘 앤 메이슨FORTNUM&MASON’ 백화점 1층에는 세계 각국의 온갖 차가 호사스럽게 놓인 근사한 진열대가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비싼 차들은 고급스러운 원목 소재의 아름다운 티 캐디Tea Caddy1) 안에 고이 모셔져 있는데, 여기엔 높은 확률로 ‘싱글 에스테이트 티’라고 적혀있을 것이다.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장을 기반으로 하는 서구의 차 산업은 대중에게 모나지 않고 균일한 품질의 차를 저렴하게 공급하는 것을 목적으로 발전해왔다. 안정적인 생산을 위해 차 만드는 기계를 제작하고 차의 품질을 한꺼번에 평가할 수 있는 테이스팅 기준을 만들었으며, 병충해와 추위에 강하고 생산량이 빼어난 차나무를 연구하기 위해 인도에 있는 세계 최초의 차 연구소 토클라이 연구소(Tocklai Tea Research Institute)를 세웠다. 영국인들의 이러한 노력과 열정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여전히 중국 사람이 발로 비벼 만든 홍차를 고가에 사 마셔야 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차라는 음료를 마실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 이들이 일군 티 플랜테이션들은 때로 티 가든Tea Garden이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대부분 에이커나 헥타르 단위로 헤아려야 하는 거대한 규모이므로 보통 티 에스테이트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다원(茶園)이라고 하고, 한 농원에서 생산된 차를 단일 다원 차, 싱글 에스테이트 티라고 부른다.

보통 티 플랜테이션에서 생산되는 차는 그대로 유통되는 것이 아니라 차 회사에 판매돼 블렌디드 티 형태로 유통된다. 싱글 오리진, 즉 단일 산지 차라고 해도 여러 날, 여러 계절, 다양한 농원에서 출하한 차를 고루 섞어 늘 일정한 맛을 내야만 하기에 엄밀하게 따지면 블렌디드 티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찻잎은 차나무에서 나는 농작물이다. 같은 사람이 동일한 밭에서 수확한 참외는 제각기 다른 맛을 지니고 있으며 같은 나무에서 열리는 복숭아 역시 전부 다른 맛과 향을 지닌다. 당연히 매일 생산되는 차 또한 오전에 만든 것과 오후에 만든 것이 다르고 기계가 한번 돌아갈 때마다 다른 차가 생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티 플랜테이션의 생산자들은 이렇게 만들어지는 단일 배치Batch의 차마다 순서대로 숫자를 붙인다. 다르질링Darjeeling의 경우에는 보통 ‘DJ’, 아쌈Assam은 ‘OR’로 시작하는 번호가 매겨지는데, 이를 ‘인보이스 넘버Invoice Number’ 혹은 ‘로트 넘버Lot Number’라 한다. 이는 티 옥션에서 판매되는 차들을 구분하기 위해 붙이는 번호다. 종종 만드는 이의 재량에 따라 ‘Ex’ 등 다른 문자로 시작하는 인보이스 넘버가 붙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같은 싱글 에스테이트 티라 하더라도 이름 뒤에 고유 번호가 붙는 차는 세상에 하나뿐인 아주 특별한 차라 할 수 있다.


공산품에서 아티산 티로
 

지금도 전 세계에서 유통되는 대부분의 차는 대형 식품 회사의 공장에서 블렌딩해 티백 형태로 출하되는 공산품이다. 각국의 마스터 티 블렌더들은 매일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차들 사이를 헤매며 지난해와 똑같은 차를 만들어내는 마법을 선보이고 있다. 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단위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차를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지가 차 생산자들의 고민거리였다. 그러나 80년대 중후반으로 접어들고 차를 대체할 다양한 마실 거리가 늘어나며 티 플랜테이션에서 만들어지는 차의 소비량이 조금씩 줄기 시작했다. 90년대 초에는 영국 정부에서 나서서 홍차를 마시자는 캠페인을 벌일 정도였다. 이 시기 중국에서는 차 시장 일부를 마침내 외부로 개방했고, 전 세계의 차 애호가들은 지금까지 접하기 어려웠던 녹차나 우롱차, 보이차 등 새로운 차에 열광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가장 먼저 위기에 직면한 곳은 인도 다르질링이었다.

19세기 중반 영국의 티 플랜터들이 일궈낸 다르질링의 차밭들은 다른 티 플랜테이션 농원들과는 달랐다. 인도를 필두로 스리랑카와 케냐 등 대영제국의 영향력이 닿는 모든 지역에 차나무를 심었다. 그러나 그들이 추앙했던 중국 복건성의 차나무로 재배에 성공한 곳은 오직 히말라야산맥 산자락에 자리 잡은 다르질링뿐이었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로버트 포춘Robert Fortune이라는 차에 특화된 스파이를 보내 차나무 씨와 차나무를 빼내고 차 제조 기술까지 훔쳤지만 결국 다르질링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중국 차나무종 재

배에 실패했다. 사필귀정이랄지, 자업자득이랄지 한때 식민지 조선에 살았던 우리들의 복잡한 시선과는 별개로 영국인들에게 다르질링은 무척 특별할 수밖에 없었기에 현재까지도 다르질링의 찻잎은 다른 차 산지처럼 자르거나 부수지 않고 정통 제법(오서독스 방식Orthodox Method)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며 다소 고가에 거래되곤 했다. 그들에게 다르질링의 차밭은 시작부터 스페셜티 티Specialty Tea였던 셈이다.

그러나 다르질링 티의 주요 수출국이었던 소련이 해체되고 경제난을 겪게 되면서 다르질링의 차 생산자들은 새로운 시장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다르질링 티에 가장 큰 관심

을 보인 곳은 독일과 일본이었다. 일본의 입장에선 대량 생산되는 저렴한 홍차가 썩 만족스럽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에서 차 문화는 대중이 아니라 귀족이나 황실 등 지배 계층을 중심으로 향유됐기 때문이다. 그들의 새로운 고객은 그때까지만 해도 그저 공장에 불과했던 다르질링의 티 플랜테이션들에 일꾼이 아닌 장인(아티산Artisan)이 되길 권했다. 더 이상 대량 생산이 의미 없어진 시대를 체감한 이들은 다양한 품종과 제다 방법을 실험하며 적은 양이지만 고부가 가치를 지닌 특별한 차를 만들기 시작했고, 각기 다른 고유 번호가 붙은 이들 싱글 에스테이트 티들에는 종종 팬시 네임Fancy Name이라는 특별한 이름이 붙었다. ‘다이아몬드’니 ‘문라이트’니 하는 이름이 대표적인 예다. 그리고 다르질링에서의 변화는 점차 다른 티 플랜테이션으로 옮겨갔다.


오래된 미래
 

장인의 손길로 정성스레 만들었다고 하여 ‘아티산 티’라고 불리는 새로운 차를 향한 관심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아티산 티가 전혀 새롭지 않다. ‘오설록’과 같은 대기업을 제외한다면 하동이나 보성에서 생산되는 우리 녹차는 대체로 작은 농가에서 장인의 손으로 소량씩 만들어진다. 또한 블렌딩 작업을 거의 거치치 않기에 새로운 퀄리티 시즌이 올 때마다 다른 맛의 새로운 차를 마신다는 것 또한 우리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최근의 아티산 티 열풍을 우리의 관점에서 ‘오래된 미래’라고 부른다. 우리에게는 이미 과거부터 이어져 온 전통문화지만 거시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앞으로의 차 산업을 이끌어갈 새로운 미래이기에. 과거에는 생산 품질이 고르지 않다는 이유로 한국 차를 수매하기 꺼렸던 서구의 차 회사조차 최근에는 소량 한정 생산이라는 마케팅 타이틀을 걸고 하동이나 보성, 제주의 녹차를 자국의 소비자에게 판매하고 있는 것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지금도 각국의 차 생산자들은 매일 각기 다른 차를 새로이 만들어내고 있다. 아마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세상에 단 하나뿐인 차일 것이다. 평생을 다 바쳐도 만나지도 마시지도 못할 수많은 차를 헤아리며, 하늘의 별처럼 무수한 차의 우주에서 필자는 때로 무한한 자유를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새로운 차를 가까이서 만나기 위해 차 산지로 여행을 떠나곤 한다. 이러한 차들과의 만남이야말로 말 그대로 일기일회(一期一會)의 인연이 아닐는지. 월간<Coffee>의 독자들도 생에 단 하나뿐인 차와의 인연이 닿길 바라며.

1) 차를 담는 통.

Writer / Photo <티에리스> 정다형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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